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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우 정치학박사 칼럼> 100세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소중함"
윤 우 전 광복회부회장
 올 4월 11일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맞은 날이다. 2천만 온 겨레가 함께한 1919년의 3.1독립선언을 구현해서 그해 4월 11일 건국한 민족사 최초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어느덧 100년을 맞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3.1운동이, 나라를 잃은 국치(1910.8.29) 9년 만에 처음으로 일어난 독립항쟁은 아니었다. 3.1운동은 임진왜란(1592-1598)에 이은 일본의 근세 재침략에 맞서 1894년 의병항쟁으로 시작된 독립운동(국권수호 ․ 회복)에서 거의 20여만 겨레가 이미 희생된 바탕 위에 일어난 최대의 우리 민족운동이었다. 또 독립지사 39인에 의한 대한독립선언(1919.2.1. 길림)과 유학생들에 의한 적진 한 복판의 독립선언-‘2.8독립선언’(1919.2.8.도쿄)에 이은 것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시기가 독립항쟁 51년(1894-1945)의 중간시점(1919)이었다는 사실은 묘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특이한 과정과 절차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건국’(1919)과 ‘재건’(1948)의 두 단계와 그에 따른 여러 과정 및 절차를 거쳤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근대 민주국가 건국원리와 방식에 따라 민주적 ․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확고한 정통성을 지닌 자유민주공화국이다. 100년의 역사는 시련으로 점철 되었다. 그러나 빛나는 성취도 함께 했다.
 
3.1독립선언을 구현한 대한민국의 건국

  3.1독립선언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부(국가)를 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민(지역)의 의사를 모아야 했는데, 당시는 일제의 통제와 감시로 말미암아 선거나 회합은 고사하고 연락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래서 부득이 국내외 각처에서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들을 중심으로 각기 필요한 절차를 거쳐 정부(임시)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 결과 처음에는 러시아의 연해주, 중국의 상해와 간도, 그리고 본국의 서울(지하)과 평안도(지하) 등지에서 8개의 임시정부가 선포되었다. 특이한 점은 8개 임시정부 모두가 공화제를 표방했다는 점이다. 그 중 5개는 오래 가지 못했고 남은 3개 즉,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3.21.수립) ․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4.11) ․ 서울 지하의 속칭 ‘한성정부’(4.23)가 그해 9월 11일 상해에서 통합되었다. 그 때 모든 것을 새로 논의하면서 법통은 본국 서울(지하)의 ‘한성정부’계승 ․ 국호는 대한민국 ․ 헌법은 임시헌법(이전엔 임시헌장) ․ 정부 위치는 상해로 결정하고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를 추대했다. 이를 ‘통합 대한민국’이라 부르는데, 바로 “되찾은 조국이요 우리겨레의 유일한 나라”였다. 그런데 건국 시점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4.11)로 된다. 역사적 의의로 보면 ‘통합 대한민국’성립일(9.11)이 더 중요하지만, 같은 국호로 연이어 두 번 건국할 수 없고, 앞의 것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국가 건국원리와 방식에 의한 ‘건국’과 ‘재건’

 대한민국은 첫째로 ‘근대 민주국가 건국 원리와 방식’에 따라 건국(1919)되었고, 둘째로 모든 과정과 절차(‘재건’포함)가 민주적으로 이행되었다는 점에서 정당성과 합법성 그리고 정통성을 지닌다. 3.1운동 직후,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각처의 독립지사들이 전국을 망라한 주민(지역)대표를 선출하여 의회(임시)를 구성하고, 거기서 헌법(임시)을 제정한 후 그에 맞게 정부(국가)를 조직해서 새 나라를 선포했다(특히 상해와 서울정부가 충실). 물론 오늘 날의 ‘ㅇㅇ갑 ․ 을 ․ 병 선거구’와 부재자 투표제 등과 같이 치밀하게 할 수는 없었다. 선거 형태는 시대와 여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의 형편을 오늘의 잣대로 헤아릴 수도 없다. 따라서 대한민국 건국 과정은 당시의 여건 즉, 지극히 비상한 상황을 감안할 때 정당하게 이행된 조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3.1운동 민족대표도 약식 선출). 어느 의미에서는 헌법 없이 선포한 독립선언일(1776.7.4)을 건국일로 간주하고 있는 미국 보다도 모범적인 건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3개 임시정부의 통합과정도 협의에 의해서 정당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정당하고 합법적이었음을 말해준다. 또 1948년 ‘재건’ 때도 건국에 준하는 절차를 다시 거쳤다. 유엔 감시하의 총선(5.10)을 통해서 선출된 (지역)대표들로 의회(제헌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제헌헌법)을 제정(7.17)한 후 정부를 수립(8.15)했다. 이는 바로 근대 민주국가 건국 절차였다.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뜻하지 않은 분단 상황에서 통일에 대비하여 나라의 기틀(國基)을 튼튼히 해야 했고 유엔 등 대외관계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다만 건국(독립)정부의 위치가 다른 신생국들은 본국이었던데 비해 대한민국은 타국(중국) 땅이었던 점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는 본국 지하의 ‘한성정부’가 국외로 나가서 국외에 설립된 다른 임시정부와 통합된 ‘망명’형태의 정부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망명정부는 2차대전 때 프랑스 등이 영국에 세운 망명정부 사례에서 보듯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한편 대한민국(임정)은 기왕의 정부 인사들이 국외에 나가서 세운 망명정부(기존 국가의)가 아니라, 신생 공화국이면서 정부 형태를 ‘망명’ 형태로 일시 타국에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 ‘망명정부’와는 다른 ‘특수 망명정부’라 할 수 있다.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우리 선열들은 일제에게 강탈당한 나라를 되찾으면서 이전 국가 대한제국(1897-1910) 즉, ‘황제의 나라’를 복원하지 않고 대한민국 즉, ‘국민의 나라’로 변혁 계승 건국했다. 참으로 현명한 조치였다. 그 변혁의 결정적인 힘은 3.1운동에서 나왔다. 3.1운동은 남녀노소․신분․지식․이념․재산․종교․신체․지역 등 모든 다름을 초월하여 온 겨레가 합심한 가운데 비폭력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택한 독립항쟁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공화정의 기운이 싹터 왔지만 변혁의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3.1운동이었다. 한편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을 변혁 건국한 신생국이면서도 국제법 등을 고려하여 계승 형태를 겸했다. 그것은 임시정부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또 실제로 국가의 상징인 국호(대한) ․ 국기(태극기) ․ 국가(애국가) ․ 국화(무궁화)를 비롯해서 국어(표준말) ․ 수도(서울) 등을 대한제국으로부터 계승했다. 현행헌법 상의 영토조항은 바로 임시헌법의 영토 조항 그대로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기구’ 또는 ‘독립준비기구’ 아닌 ‘국가’와 ‘정부’

  대한민국은 광복 때까지 정부를 ‘임시정부’형태로 운영했다. 본국을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조건에서 정부를 타국(중국)땅에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라는 호칭은 본국 아닌 타국 소재 정부라는 점, ‘임시’가 아니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문제도 고려해야 했던 점 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되찾은 조국 대한민국의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 덩어리의 ‘임시기구’나 ‘독립준비기구’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의 신생 민주공화국과 그의 ‘정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임시’가 아니라 정부가 ‘임시’형태였을 뿐이다. 국가와 정부는 같이 쓰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다른 것이다. 정부는 국가의 통치권을 맡아 수행하는 3부 기구 또는 행정부를 말한다. 바로 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 후 26년(1919-1945) 동안이나 더 지속된 독립항쟁을 총괄지도하여 마침내 광복을 쟁취한 것이다. 건국 후 독립전쟁을 지속 한 사례는 허다하다. 

‘임시정부’형태(광복 이전) ⟶ ‘정식’정부(광복 후)
 
 광복 전 정부를 타국에 ‘임시’형태로 두었던 대한민국은 광복 후 ‘정식’정부로 대체했다. 그 것이 바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1948.8.15)이라는 이름의 ‘재건’행사였다. 따라서 1948년의 서울 정부수립은 이른바 ‘단독정부’가 아니라 ‘정식정부’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물론 당시의 상황에서 통일정부가 아니라는 의미로 ‘단독’이라 했겠지만, 거기에는 마치 대한민국(1919건국)이 ‘반통일’노선을 취했던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실제는 그 반대였다. 그때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이 소련의 지시와 지원에 따르지 않고, 기존 조국인 대한민국의 정치세력과 협의했다면 분단을 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북한지역에 정권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경위를 알아볼 필요성이 제기 된다. . 

북한정권은 소련이라는 ‘외세’가 만들어 준 ‘분리정부’

 2차 대전 중 일본과의 태평양전쟁(1941.12.8-1945.8.15)을 3년 8개월 7일간(종전일까지) 계속 중이던 미국은, 종전 7일전(1945.8.8)에 참전해서 8월 9일 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이 지리적 접근성으로 만주와 한반도 동북부에서 급속하게 남진하자 그를 적정선에서 차단하고자 북위 38도선을 미․소 양국군 관할 경계선으로 삼자고 제의했다(1945.8.10). 그리고 그 제의를 소련이 수락함으로써 생긴 것이 바로 ‘군사관할경계선’으로서의 38선이었다. 따라서 38선은 주둔군(미․소 양국군)이 철수하면 자동 소멸되는 선이었다 실제로 미군은 1949년 6월, 소련군은 1948년 12월에 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8선이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굳어진 것은 소련이 처음부터 38선을 봉쇄하고 북한지역에 정권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38선을 제의한 것은 미국이고, 그것을 남북 분단선(소련 입장에서는 ‘국경선’)으로 굳힌 것은 소련인 것이다. 소련은 공산주의 팽창과 자국(소련)의 세력 확산을 위해 소련군 주둔지 마다 공산 위성정권을 구축했다 
 
 북한정권은 소련 수상 스탈린(1878-1953.3.5)이 “소련군 주둔 지역에 민주정부를 구축하라”고 지령(1945.9.21)한데 따라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련이라는 외세”가 만들어 준 ‘분리정부’이다. 그러한 사실은 광복 직후 논란된 바 있었으나 긴 냉전상황(1945-1991)에 가려져 있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비밀문건과 관계 당사자들의 증언 등으로 낱낱이 들어났다. 북한에서 외치는 ‘주체’라는 것이 과연 타당한 말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일이다. 소련은 북한인을 내세워 일찍이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 토지개혁과 주요재산 국유화 조치 등을 단행했다. 그러한 조치는 정부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후 대한민국(1919년 건국)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1945.12)에 의한 미․소공동위원회(1946-7)가 결렬된 후, 임시정부를 대체할 ‘정식’ 정부를 서울에 수립(1948.8.15)하자, 북에서는 곧 이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공표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라는 ‘외세’의 작용이 컸던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정권은,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한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소련이라는 ‘외세’가 북한인을 내세워 불법적으로 세운 ‘분리정권(부)’인 것이다. 이는 당시 미국은 소련과 달리, 남한에 미국 주도의 정부 수립을 도모하지 않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을 모색했던 것과 대조되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소중한 가치

 하나 밖에 없는 목숨까지 내놓고, 가족․친지․재산 등에도 미치는 위해와 손실 등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직 나라 찾기에 헌신하신 선열들께서는 조국의 분단이란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 된지 70년이 넘은 상태이다. 분단 현실에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더욱 중시된다. 대한민국은 분단 이전(1919)에 건국된 ‘원천국가’로서 통일주체 우선권을 갖기 때문이다. 

윤 우  전 광복회 부회장.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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