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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위치: Life

  "연산군 폐위된 날 탕춘대 글 실록에 올라갔다. "
- 자하문고개· 탕춘대고개 -
폐왕(廢王) 연산군(1476~1506)에게 ‘조지서’는 둘이다. 하나는 조선의 종이를 만들었던 조지서(造紙署)다. 다른 하나는 세자 시절 스승인 조지서(趙之瑞, 1454~1504)다. ‘관아 조지서’와 ‘사람 조지서’는 연산군을 가늠하는 징검다리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모두 등장하는 이 둘은 고개 몇 곳을 건너면 뚜렷해진다.

연산군은 창의문을 나와 북쪽의 장의사(藏義寺, 현재의 세검정 인근) 근처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연산군일기(연산 12년 1506년 9월 1일)에서는 그렇게 봤다. 그러니까 연산군이 음주·가무를 위해, 자신이 좋아했고 잘했다고 평가 받는 시를 읊기 위해 현재의 자하문고개를 줄곧 내려갈수록, 자신의 내리막길은 더욱 속도를 급히 내고 있었다는 게다.

경복궁에서 자하문고개를 넘어 서울 종로구 신영동 삼거리. 근처에 빛바랜 함석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한옥 풍의 건물이 있다. 이곳, 방주목공소는 70여년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목공소의 이원우(67) 사장보다 나이가 많다. 이 사장은 “이 근처가 많이 변했지만, 이 건물 하나만은 옛날 그대로”라며 “흙바닥에 거적만 깔고, 목재는 요새처럼 눕히지 않고 세우는 클래식 목공소”라며 웃었다.

이 목공소와 근처 세검정초등학교는 조지서 터로 알려져 있다. 그 옆에 장의사가 있었다. 이보다 조금 더 북쪽 신영동 삼거리 모퉁이를 조지서 터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연산군이 조지서를 들쑤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지서를 홍제원 위로 옮겨 짓고, 곁에 가까운 인가를 모두 철거하며, 장의사에 사는 중도 내치고서, 동리 어귀를 한계하여 목책을 설치하라(연산 10년 7월 14일).’ 연산군은 이를 친히 점검한다고도 했다. 이궁(離宮·별장)을 짓기 위함이었다. 50칸짜리 작은 규모이나, 이 이궁은 연산군을 향락의 왕으로 규정짓는 수많은 ‘부동산 정책’ 중 하나가 됐다.

조지서의 다른 이름인 ‘조세’를 따라, 그 앞길을 조세고개라고 부른다. 하지만 탕춘대고개라고 부르는 이가 더 많다. 서울에는 크고 작은 고개가 230여개. 깎이고 다듬어져 저게 고개인가 싶은 곳도 여럿인데, 탕춘대고개가 꼭 그렇다. 이씨는 “1972년에 도로를 확장한다며 잘라냈다”라며 탕춘대(蕩春臺) 터를 알려줬다. 번듯한 빌라가 탕춘대 터 어깨를 빌려 자리 잡고 있다.

‘왕이 장의문(창의문) 밖 조지서 터에 이궁을 지으려다가 시작하지 않고, 먼저 먼저 탕춘대를 세웠다…여러 신하에게 과시하고자 놀고 구경하기를 명하였다(연산 12년 1월 27일).’ 이날은 연산군은 신하들과 ‘신정(新亭)’에 갔다. 신정은 탕춘대에 세운 정자로 보인다. 이 기사에서, 조지서는 자리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하나 더, ‘과시하고자(欲誇示)’는 표현은 어째서일까.

연산군은 사림과 훈구파 어느 쪽도 거두지 못하고(혹은 않고) 무오사화·갑자사화로 사대부를 절단 냈다. 사관들이 왕의 사후에 쓰는 실록에서의 평가가 좋을 리 없었다. 연산군 자신조차 역사에 어떻게 남을지 두려워했다. ‘만약 내가 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여러 역사책에 써 놓으면 장차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연산 3년 6월 5일).’ 후대의 평가는 ‘폭군’으로 갈무리됐다. 신권에 맞서 왕권 강화에 나서다 결국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다.  연산군은 리더십이 부족했다. 그는 신하들의 도전을 참지 못했다. 그중 한명이 조지서다.

탕춘대고개 앞 세검정을 받치고 있는 넙적바위 차일암(遮日巖)에서는 매번 실록 작업을 마친 관리들이 세초(洗草) 행사를 벌였다. 실록의 기초 자료인 사초(史草)를 물에 씻는 것이다. 그 세초에 참석했을지 모를 사관이 연산군일기에 이렇게 썼다. ‘왕이 동궁에 있을 적부터 이미 학문의 강독을 즐기지 아니하였고, 간언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처리하는 조짐이 말씨와 얼굴에 나타났다. 풍간(諷諫·완곡하게 잘못을 고치도록 간함)하면 곧 얼굴을 찌푸렸다. 조지서·황계옥·이거·정여창 등을 늘 좋아하지 않았고…. (연산 5년 1월 11일).’

특히, 연산군의 조지서에 대한 악감정은 집요했다. 일찍이 조지서가 상소했다. 1495년 4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직후였다. 어머니 폐비 윤씨의 친족들을 거두고, 언로(言路, 신하가 임금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길)를 열어둘 것 등을 주문했다. 연산군은 조지서를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폐비를 거적에 싸서 들판에 장사 지냈다(藁葬·고장)는 표현이 영 마뜩잖았기 때문. 하지만 의정부가 반대했다. “언로가 막힐 것을 염려한다”는 이유였다.

조지서는 당시 국문을 면했지만, 시련은 이어졌다. 1496년 1월 충남 서산의 유승양이라는 선비가 ‘조지서와 정성근을 등용하면 주공이 성왕을 돕듯 할 것’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연산군은 격노했고, 이 상소는 조지서가 죽을 때까지 그의 발목을 잡았다.

1504년 갑자사화 때였다. 경남 진주에 있던 조지서가 끌려왔다. ‘지서가 비중한 몸으로 결박을 당하니 숨이 막혀 형장 3대를 맞고 그만 죽어 버렸다(연산 10년 4월 16일).’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은 조지서의 머리를 베어 효수하라고 일렀다. 죄명은 ‘저 스스로 높은 체하고 군상(君上)을 능멸한다’는 것이었다. 실록은, 백관들로 하여금 보게 했다고 적고 있다.

조지서는 1506년 신원(伸寃·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됐다. 1506년은 연산군 12년이자, 중종 원년이 되는 해다. 이해 9월 12일은 연산군일기의 마지막이다. 이날 중종이 즉위하고 연산군이 폐위됐다. 연산군의 행각은 낱낱이 고해진다.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길을 이리저리 내고, 밤낮으로 시녀들과 놀았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삼각산 밑 장의사동에 있는 탕춘정인데…강물을 끌고 또 산을 뚫어 다른 시냇물을 정자 밑에 합류시키려 했는데, 모두 이루지 못했다….’

지난달 23일 탕춘대성.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에는 ‘성곽에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안내판이 준엄하건만, 옥천암 뒤 이 탕춘대성 초입은 어쩔 수 없이 성곽을 밟을 수밖에 없게 길이 만들어졌다.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성곽이다. 그런데 홍지문과 인왕산 벽련봉(기차바위) 사이에는 성곽이 없다. 『한양, 성을 걷다(새로운사람들, 2021)』의 공동저자인 도경재 한양도성 길라잡이는 "바위 자체가 성이 되는 자연성(自然城)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기차바위에서는 경복궁·창의문·자하문고개·탕춘대고개가 훤히 보인다. 연산군은 그 길을 지나 탕춘대에 다다랐을 터.

탕춘대는 연산군의 연회 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군사적 요충지로 거듭났다. 숙종대부터 영조대 사이에 탕춘대성이 만들어졌다. 총융청(摠戎廳, 도성 외곽 방비)이 탕춘대에 자리 잡고, 영조는 탕춘대를 ‘무사 양성’이란 의미의 ‘연융대(鍊戎臺)’로 바꿔 부르게 했다.

도경재 길라잡이는 “탕춘대성은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잇는 서성(西城)으로 부른다”며 “그렇다면 동성(東城)이 있다는 뜻인데, 옛 지도에도 표시된 한양도성의 곡성~구준봉~보토현(북악터널 위)~형제봉~보현봉을 잇는 구간으로, 실제 축성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선의 군사 개혁을 주장한 송규빈(1696~1778)은 『풍천유향(북한산성 사료총서 제5권, 경기문화재단, 2021)』을 통해 ‘조지서와 연융대라는 철옹성을 서울의 뒤뜰로 삼아 주었다’며 탕춘대 인근의 군사적 중요성을 밝히기도 했다.

탕춘대고개 밑,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차일암 위 얼음판에서 포대를 깔고 미끄럼을 탄다. 연산군일기의 밑바탕인 사초가 씻겼을 곳이다. 세검정이 말없이 지켜본다. 연산군의 편은 없었다. 연산군 12년간을 담은 연산군일기는 그래서 헷갈리게 만든다.

멀리 탕춘대성에서 자하문고개를 바라본다. 그 너머에 조선 권력의 정점 경복궁이 있다. 그 뒤엔 국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청와대가 있다. 다음 달, 누가 그곳에 들어갈 것인가. 역사는 숨겨도, 부풀려도, 덧칠해서도 안 된다.

중앙선데이 김홍준기자님 글 발췌   rimrim@joongang.co.kr  



  등록일 : 2022-02-18 [11:36]  [뒤로] [인쇄] [기사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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