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충남 예산 덕숭총림 수덕사 산중(山中)총회에서 제4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된 설정(雪靖·67) 스님은 23일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방장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대형 사찰인 '총림(叢林)'의 최고 어른으로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수덕사는 경허(鏡虛), 만공(滿空) 스님이 머물며 근대 한국불교의 선맥(禪脈)을 중흥시킨 터전으로 광복 후에도 벽초(碧超), 원담(圓潭), 숭산(崇山) 스님 등이 수행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설정 스님은 1955년 수덕사에서 원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수덕사 주지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등을 역임한 후 지난해 3월 입적한 원담 스님의 뒤를 이어 이번에 방장에 추대됐다. 지금도 참선과 농사를 병행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전통이 살아 있는 수덕사 출신답게 그는 검정고시를 통해 1976년 서울대 농대를 졸업했다.

설정 스님은 기자간담회에서 '자기다움과 원형의 회복'을 강조했다. "중은 중답게, 정치인은 정치인답게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 데서 시비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승가(僧伽)에 대해서는 투철한 신심(信心), 개인적인 모든 것을 내놓는 공심(公心), 그리고 위대한 진리로 중생을 고통에서 건지겠다는 원력(願力)의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만 빠져도 결격사유라고 못박았다.

"옛 말씀에 무신불립(無信不立), 즉 믿음이 없으면 똑바로 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그 전형적 모습입니다. 모두가 자기다워질 때 사회가 안정되고 가정이 행복하고 국가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설정 스님은 "신의가 있으면 단결되고 그러면 힘이 생긴다"고도 했다.

현재 전 세계가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는 '용기를 가지라'고 권했다. "사바세계에서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행(幸)과 불행(不幸)은 언제든 맞물려 있습니다. 잘 될 때 흐느적거리지 말고, 어렵다고 절망·좌절해 용기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1998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던 설정 스님은 "병이 왔을 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고 했다. "저희 신앙인은 인과(因果)를 믿습니다. '내가 전생(前生)에 많은 생명을 죽이고 못되게 했나 보다' 생각했지요. 그리고 부처님과 모든 생명에 끝없는 참회를 했습니다.